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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 회복의 동산(황학만 목사)

      날짜: 2017. 11. 20  글쓴이 : 김민호목사

      조회수 : 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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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복의 동산
          

        글: 황학만 목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해서 십자가가 죄인들에 대한 구속의 상징으로만 남진 않았습니다. 
          갑옷과 방패에 붉은 십자가를 새겨 넣고 십자가깃발을 앞세워 전쟁을 일삼았던 중세유럽의 십자군이나, 십자가에 성호를 긋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 십자가로 찍어 살해했던 반 개혁자들이나, 검정 까운에 대형십자가를 메고 고함을 지르며 집회현장을 주도하는 오늘날 교직자들이 십자가를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했던 것을 보면,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만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십자가는 그토록 그리스도를 모독한 도구로, 십자고상(十字苦像)은 악귀를 쫓아내는 미신의 형상으로 취급되었었습니다.
         
          유대민족은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중세교회와 근세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2천 년이 가깝도록 유럽각지의 격리된 구역(Ghetto)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집요한 박해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 탓에 그들에게 십자가는 증오의 표식일 뿐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도로에 십자형 사거리가 없고, 병원의 구급차에도 녹색십자표시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숫자 ‘4’의 중심에 십자가형태가 보인다고 해서 우측에 삐져나온 선을 떼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원한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상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가입니다.

          갈라진 십자가 끝을 세 쪽의 둥근 꽃잎모양으로 보기 좋게 장식된 것이 중세교회의 표식이라면, 아무런 장식 없는 십자가는 개혁된 교회의 표식입니다. 그리고 그 표식은 제단과 강단에서 또 한 번 다르게 나타납니다.
          중세교회의 제단 뒤에 걸려있는 십자가가 예수께서 고통스럽게 매달린 형태의 십자고상(十字苦像)이라면, 개혁교회의 십자가는 예수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알리는 빈 십자가입니다.
          유월절마다 양 잡던 피의 제사는, 그 실체로 오신 예수께서 단번에 드려진 제물이 되어, 그 제사는 역사 속에서 이미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므로 빈 십자가는 과거 역사 속에서 추악하게 오용되었다고 해도,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구속(救贖)의 은총을 상징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10cm두께의 거대한 휘장이 ‘지성소(至聖所)’에서 갈라지는 기이한 현상과 함께, ‘다 이루었다’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선언을 묵살한다면, 복음서의 증언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오늘날까지도 제사를 위해 예배당은 여전히 성전으로써 성당이며, 매번 제물을 바쳐야 할 제단뿐만 아니라, 그 집례를 위한 사제제도역시 여전히 존속되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신앙상태와는 무관한 채 밀병(餠)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그것은 자신의 몸속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로 변화하여 그리스도와 일체가 된다는 신비의 그 은총을 믿어야할 겁니다. 그것이 이른바 화체설(化體說)인 것이지요. 
         
          개혁된 교회의 예배당에는 제단이 아니라 강단이 놓여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자기백성에 대한 구속(救贖)을 완성하셨으므로 성경말씀만이 생명의 양식이 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강설(講說)하는 강단이 놓여있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도 화체(化體)가 아니라 오감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경험하는 시각화된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개혁기에 개혁자들은 예배당에 모든 화상(畵像)과 함께 십자가역시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일 뿐, 오늘날의 예배당엔 십자가가 어느새 장식으로 자리 잡았지요. 천주교회가 아닌 이상 그것을 우상시 하는 교인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장식은 달라도 십자가는 구교든, 신교든, 공통적인 교회의 상징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라서 그 예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식을 깨고 십자가가 걸려있어야 할 강단배면에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글귀로 장식한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십자가는 어디가고 여호와를 경외하라니,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인가? 
          그 경구(警句)는,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은 완성되었어도 여전히 하나님께선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의미와, 구속(救贖)된 백성의 자리로서 그 ‘회복(回復)’의 선언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이름도 강단배면의 글귀와 짝을 이뤄 《회복의 교회》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보면, 그 글귀는 예배 시 성령께서 에덴동산으로 부르시는 초청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그곳에 두 나무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리키는 나무와, 하나님을 경외의 대상으로써 그분의 영광의 자리임을 가리키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금단(禁斷)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한 사건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피조물로서 의존적 관계임을 정면으로 타파한 패악이었던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한 몸으로써 의존관계가 깨져, 무화과 잎을 치마로 해서 피차 숨기고 가려야 하는 사이가 되었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찾는 음성을 피해 숲속으로 달아나 숨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도 그 결과였습니다. 피조물로써 의존적 관계는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부부뿐 아니라 부자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모두가 의존적관계가 파괴되고, 질서 없는 혼란과 파괴만이 난무한 죽음의 세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떠난 에덴은 아들 잃은 가정처럼, 하나님의 곤혹과 슬픔의 동산이 되고만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죽 옷으로 입혀 내보낸 것은 장차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사랑의 증표였습니다. 그들의 죄 값을 한 짐승의 피에서 찾으시겠는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선 그렇게 피 흘려 죽으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구속(救贖)함을 입고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이 회복된 그의 백성들은, 가정과 교회에서, 본래의 의존성과, 그 질서가 회복되어 하나로 연합을 이룰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나 하나님을 경외할 은총의 자리로 돌아가, 그분을 영원토록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동산중앙의 생명나무도 그 백성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은총의 나무였습니다.
         
          그러므로 강단 배면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명령적 선언은 죽음이 사라지고 영생의 생명수가 흐르는 동산인 하나님나라로써 경험케 하고, 그곳에 초대된 백성들은 그 화답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감격과 기쁨에 찬 그 한마디, “아멘~!”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으로써 창조주에 대한 의존적관계가 회복될 때만이 인간의 기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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