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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재앙 속에서 회개와 격려의 문제

      날짜: 2020. 02. 26  글쓴이 : 김민호목사

      조회수 :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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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재앙 속에서 회개와 격려의 문제

         

         

        김민호 목사

         

        기독교 신앙에서 현상에 대한 해석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우연은 없다. 만일 기독교인이 우연이라는 한 단어를 허용한다면 그 순간부터 이신론자의 논리를 인정 할 수밖에 없다.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이 온 세상과 자연 법칙을 만들고 자신은 역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두산백과사전은 이 주장을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啓示)를 부정하거나 그 역할을 현저히 후퇴시켜서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의 종교관이라고 가르친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자유주의 관점이라는 뜻이다. 이 관점은 자연 재앙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경멸한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물리현상일 뿐, 그 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여전히 르네상스 이전의 신화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고루(固陋)한 자일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반을 둔 부분이 많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나 나르시즘(narcissism) 등이 대표적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이런 식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반을 두고 심리학 체계를 세운 부분이 많다. 계몽주의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주장은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겐 이런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과학적이고 합리성이 있다고 손을 들어준다.

         

        이제 우한 바이러스와 메뚜기 떼가 온 세상에 창궐하게 된 사태를 어떻게 보는 것이 성경적인지 생각해 보자. 기독교인들 중에도 메뚜기 떼는 기온 변화에 의한 우연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또 우한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된 것은 인재’(人災)라고 본다. 어떻게 주장하든지 이 두 가지 관점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빼고 생각하자는 이신론적 관점이다. 표현만 다를 뿐 원리에는 차이가 없다. 두산 대백과 사전의 표현을 따르면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啓示)를 부정하거나 그 역할을 현저히 후퇴시켜서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의 종교관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는 믿음의 눈이 아니면 우연이나 인재로 해석하기 쉬운 영역들로 가득하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에 내려진 전염병은 계시(삼하 24:1)가 아니었다면 우연처럼 볼 수 있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치어 죽은 사건도 예수님의 해석이 아니라면 인재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5)는 하나님의 경고로 해석하셨다. 인재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계시한다는 말이다.

         

        신앙은 해석의 문제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의 신앙이다. 인간이 타락한 후부터 인간은 하나님 빼고 팩트(Fact)를 해석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환경이나 남 탓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적 태도를 합리적이고 지적이라고 평가한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와 탓으로 돌렸고, 하와는 뱀의 탓으로 돌렸다. 여기서 인간이 문제를 해석하고 진단하는데 절망적이다. 해석과 진단이 잘못되면 솔루션(solution/해결책)을 찾을 길이 원천적으로 막힌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해석과 진단이 달라지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복음의 위대함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진단한다. 그리고 구원이 발생한다.

         

        그러나 작금의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적인 해석과 진단을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 한다. “자연재앙을 죄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말라한다. “정죄보다 위로와 격려로 재난을 극복하자고 한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해석임에 틀림없다. 구별됨이 없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의 모든 비극과 문제가 죄에 있음을 가르친다. 아마도 21세기에 이런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리가 20세기 중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들 또한 완전히 새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생각은 전후 세계니 과학 시대니 원자 시대니 기독교 후기 시대니 하는 말들로 포장되어 교회의 활동과 사고에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헛소리입니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명료하게 해석하고 진단해야 한다. 모든 비극의 문제를 죄의 문제부터 진단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주님은 앉은뱅이를 고치신 후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5:14)고 하셨다. 중풍 병자의 병을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5)고 하셨다. 죄와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문제를 죄와 관련하여 지적하셨다. 물론 모든 것을 죄의 문제라는 일방적 해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작금의 문제를 자꾸 죄의 문제라고 정죄하지 말고 위로와 격려로 극복하자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교회의 현 주소를 보라.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과 같은 혐오스런 예배가 보편화 됐다.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1:8)고 한 책망이 우리를 향한 책망으로 들리지 않는가?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보라. 종교 생활에는 열정적이지만 교회 안에도 간음, 동성애, 탈세, 부정부패가 세상과 동일한 비율로 일어난다. 이 모습은 이사야서에서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58:4)는 말씀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세상 속에서 교회가 구별된 모습이 없다.

         

        이런 교회를 향하여 위로와 격려가 먼저인지, 회개가 먼저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로와 격려는 회개한 자들의 몫이다. 자꾸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칠 것이 아니다. 이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8:11)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오해하지 말라 예배당에 앉아서 눈물 흘리며 회개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문제 해결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자는 말이다. 관계를 회복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자동적으로 소금과 빛으로 살게 된다. 종교 개혁자들은 회개만 외친 사람들이 아니다. 회개를 외치면서 실천했다. 역사상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고 가정과 직장과 캠퍼스와 정치와 교육의 영역에서 삶을 구체적으로 개혁하고 빛 된 삶을 살았다. 질병이 창궐할 때, 개혁자들은 회개만 외친 것이 아니라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오해하는 것은 회개와 실천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회개 없는 실천, 실천 없는 회개를 성경이 지지한 적은 없다. 다 거짓된 것이라고 정죄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교회당에서는 회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법하고, 간음하고, 이기적이고, 불성실 하고, 방탕하다. 이런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신음한다. 기독교인들을 혐오한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작금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섣불리 연결 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제고해보자는 의미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위로와 격려가 먼저인지, 회개의 선포가 먼저인지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어느 기독교 언론에 기록된 한 줄이 마음을 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스스로의 교만과 죄를 깊이 회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그렇지 않고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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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1)

    • 2020-03-01  박승진 

      저의죄를 깨닫고
      남탓하지 않는
      성도로 이끌어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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