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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김근주 교수의 “안식, 그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반론

      날짜: 2020. 05. 02  글쓴이 : 김민호목사

      조회수 :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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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근주 교수의 안식, 그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반론

         

         

         

         

        중국발 코로나19 펜데믹으로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추구했던 보수적 주일 성수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주일 성수에 대해 김근주 교수가 안식, 그 거룩한 부르심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이 글을 읽고 부족하나마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반론을 제기하기 전에 김근주 교수의 안식일 논증을 위한 구약신학적 접근방식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구약을 해석하는 그의 접근방식은 매우 유익하고,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성막 제조와 레위기19장 율법에 대한 성경의 구조 속에서 안식일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성막 건조와 율법이 안식일의 바운더리(boundary) 안에 있음을 탁월하게 논증했다. 그 외에도 그의 논증은 지적인 즐거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접근방식이 두드러진다. 그 후에 그는 오경 율법 체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이 단지 여러 규정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거룩한 삶과 연관해서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감동적인 요약으로 한 단락을 마무리 했다. 그의 이런 구약신학적 접근방식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크게 거부감 없이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그의 논점이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해방신학적 관점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분명 안식일 규정이 단지 여러 규정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거룩한 삶과 연관해서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했다. 그렇다면 그 해석과 적용도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 관점으로 가야 마땅하다.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안식일을 본다면 단순히 노동의 쉼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 그는 안식일을 안 지키면 처벌하는 것은 그 날을 반드시 지켜서 쉬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안식일 노동은 단순히 쉬지 않기 때문에 처벌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만을 위해 봉사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한 일을 하기 때문에 죽임 당한 것이다. 안식일은 무노동을 의미하는 날이 아니다. 6일과 구별된 노동(하나님을 위한 노동)의 날이다. 때문에 제사장은 안식일에도 노동을 쉬지 않는다. 제자들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 행한 것 자체가 안식이라는 것이 성경의 논리다. 구약 율법의 관점에서 안식일의 노동은 분명히 엄격히 금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하는 일은 예외로 여겨졌다. 박희석 교수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우선되는 일이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우선되고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하여 그보다 덜 중요한 원리인 일하지 말라는 계명은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시기 전에, 그 행위를 의료 노동으로 정죄하며 바라보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무엇이라 반문하였는지 생각해 보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

        이 말씀은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 것임에 틀림없다. 안식일은 노동을 금한 소극적이고 부정적 명령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 살리는 예배의 삶을 천명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해 정죄하는 대상은 자기를 위해살아가는 삶, 다시 말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나, “죽이는 것과 같은 유형의 삶이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해 기대하신 것은 옛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노동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신약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이다.

        이렇게 안식일을 자기를 위해 노동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노동하는 날로 해석할 때, 비로소 김근주 교수가 안식일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라 한 주장과 맥락을 일치시킬 수 있다.

         

        김 교수의 안식일과 노동에 대한 적용은 막시즘적 관점으로 적용하면서 그 비약은 더 심해진다. 그는 안식일 준수는 개인적 영역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공동체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구약에 근거해서 주일 성수를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노동으로부터 사회적 약자들을 쉬게 하는 것이 가장 관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김 교수는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를 너무 사회적 공동체로만 몰아간다. 그래서 안식은 예배하는 날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날에 초점이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은 진보적 노동관을 이입시키기 위한 부자연스런 해석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분명히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였다. 여호와 신앙을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신약 관점에서도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지 않으셨다(1:47). 바울도 육적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라 규정하지 않으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만을 참 이스라엘로 규정한다(9:6-8).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언약 받은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7:38)라 지칭했다.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둔다면, 안식일 노동 금지를 굳이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쉼의 관점으로 해석 하는 것은 이념적 편협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예배)을 위해 7일 가운데 하루를 구별하여 6일과 다른 노동 하는 날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안식일 노동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노동의 회복을 의미한다. 약자들을 위해 쉼을 주는 행위가 아니다. 이 노동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섬기는(예배) 행위였다. 이 관점이 주일 성수 정신에 그대로 녹아있다. 라이언 M. 맥그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을 예배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기신 노동도 즐거운 섬김(예배)의 일부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이 안식한 대로 안식하라 명령하신 날에 그분과 교제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또 다루어야 할 부분이 있다. 김 교수는 레위기 26:1-2이 우상 숭배 금지와 안식일 준수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1절은 우상의 본질이 자기를 위하여임을 분명히 한다고 했다. 계속해서 이러한 우상의 본질은 결국 인간 욕망의 외적인 투영이요 투사일 뿐이라 했다. 참으로 적절한 해석이다. 그러나 적용에서 또 다시 개인 이념이 투영되면서 오류가 발생한다. 그는 말하기를 이 문제(우상숭배 문제)는 단순히 타종교와 여호와 신앙의 갈등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타종교에 대한 거부나 공격이지 않다고 한다.

        이방종교의 특징이 무엇인가? 그의 표현처럼 인간 욕망의 외적 투영이 아니던가?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4:16) 새겨 만든 것이 아닌가? 이런 종교적 이유 때문에 구약은 이방사람과 결혼을 엄격하게 금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그 땅 거민들을 남녀노유 불문하고 죽이도록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우상과 짐승과 모든 재물을 다 멸하도록 하셨다. 이것을 소위 헤렘 전쟁이라고 한다. 이렇게 끔직한 전쟁을 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어떻게 레위기 26:1 말씀으로 단순히 타종교와 여호와 신앙의 갈등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는 논리에 도달할 수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글을 정리해 보자.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고 하셨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신 것은 분명히 구약의 안식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다. 이 선언은 단순히 노동의 쉼을 의미하지 않았다. 죄로부터의 쉼, 율법의 정죄로부터의 쉼을 말한다. 레위기 26:1의 말씀처럼 자기를 위한노동을 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노동에 참여 할 것을 암시한다. 때문에 바울은 이 안식에 들어간 사람을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14:7)로 표현했다. 이 쉼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 받은 자들이 누리는 영광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안식으로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게 된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한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분명히 주님의 멍에를 메는' 사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멍에를 메는 것이 어떻게 쉼이 될 수 있는가? 이는 안식이 단순한 노동의 중지를 의미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4:10)고 한 가르침을 생각하면 더 분명해진다.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단순히 물리적 노동을 쉬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일(옛 아담의 일)을 쉬는 것이다. 김 교수가 레위기 26:1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처럼 우상 숭배의 멍에를 벗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의 멍에를 메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차원에서 주일 성수는 공적으로 예배할 뿐 아니라, 삶 속에서 하루 종일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삶의 예배에 온전히 투신하는 날로 이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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